설교본문 : 요한복음 1장 29절-42절


작년도 10월 13일, 300여명의 이슬람 학자들이 전 세계에 있는 기독교회와 유대교회를 향해서 A Common Word between Us and You를 발표했습니다. 이문서는 세 종교의 공통된 핵심을 “하나님을 온 맘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로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기초로 더 이상 서로 반목하지 말고 평화를 이루어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의 배경이 된 것은 교항 베네딕트 16세의 “이슬람교는 폭력적인 종교”라는 발언이었습니다.
 
이 Common Word에 대하여 역시 300명이 넘는 기독교 목회자, 신학자들이 응답서를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사랑을 종교의 기초로 강조한 이슬람 학자들의 입장을 주목하고, 세계의 평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협력하자는 요지를 담은 응답서입니다. 이 응답서에 싸인을 한 지도자들 중에 새들백교회의 워런, 윌로크릭교회의 빌 하이비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문서에 불쾌감을 표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침례교 목사인 몰러는 대화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대화하는 방식을 비난했습니다. 몰러는 이 응답서가 예수의 유일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 대하여 이슬람권에 사과하는 내용을 문제 삼았습니다. 오히려 ‘사과 받아야 할 쪽은 우리다’라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이슬람 학자들이 발표한 문서와 이에 대한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응답서, 그리고 그 응답서를 둘러싼 갈등을 주의 깊게 보면서, 복음의 핵심에 해당되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용서’라는 주제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간의 원한과 불신은 깊고도 깊습니다. 서로 주고받은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리고 지금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과 관련하여, 종교간 대립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신앙의 본질을 반추하며, 사랑의 복음, 평화의 복음을 나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 주고받는 용서가 중요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신년도 설교본문들이 용서와 관련되어 채택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추적하고자 택해진 본문들인데 한결같이 용서를 그 핵심 주제로 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는 신앙생활의 기초요 추진력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이 주제 선상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전하는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본 세계종말의 환상에서도 “어린 양”에 대한 비전을 그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요한계시록5:6)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영광된 하늘보좌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죽임당한 것과 같은 어린 양’입니다. 메시야의 본질을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외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말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먼저 “세상”이란 단어를 주목해 봅니다. 원어로는 ‘코스모스,’ 우주,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선한 피조물입니다. 비록 타락으로 하나님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 세상 자체가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피조물 세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라고 말할 때는 그 회복을 전제합니다. 타락의 아픔을 토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했던 세상이 “죄”에 지배되고 있다니요..... 참으로 아픈 사실입니다.
 
그 죄를 해결하고 본래의 세상으로 회복하는 길을 말할 때 “지고 간다”고 말합니다. 떠안고 간다는 말입니다. 폭삭 두들겨 부수고 가는 것도 방법일 터인데, 떠안고 간다고 합니다. “지고 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어린 양”이란 말에 답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절 3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알리어라. 이 달 열흘날 각 가문에 어린 양 한 마리씩, 곧 한 가족에 한 마리씩 어린 양을 마련하도록 하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월절을 기억하고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애굽에 내린 열 번째 재앙이 장자를 거두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들이 과연 죽음의 심판을 면할 자격이 있었나요? 오히려 애굽 땅에서 우상을 섬기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심판받아야 마땅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약속 때문에 그들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그냥 그 죄를 지나칩니다. 그러나 그냥 용서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침내 그들을 애굽 땅을 벗어나 가나안땅을 향하게 합니다. 변화를 향하야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비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용서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비전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비전이었습니다.
 
이 ‘어린 양’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그의 형 시몬을 불러옵니다. 그를 보자마자 예수님은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게바(베드로)라 하리라.” 베드로는 ‘바위’(Rock)란 뜻이지 않습니까? 구약에서 ‘바위’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형편없는 인생 시몬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언어로 이름을 갖게 됩니다. 시몬을 용서하고 변화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어린양의 비전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마태복음 18:18-20) 요한복음에 보면 매고 푸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해 주면 사해질 것이요, 사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23절).
 
어린양의 비전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비전이 되고, 그들의 비전이 오늘 우리들의 비전이 됩니다. 용서를 통한 변화의 꿈!  “어린양”의 비전은 용서를 통하여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충만한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살아가는 꿈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 그리고 용서를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비전입니다.
 
‘밀양’에서 박도식이 보여주는 용서에 대한 태도는 용서를 값싸게 만들어 버린 신앙의 타락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그는 신애에게 무릎을 꿇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데드맨워킹’에서 강간살인범 폰스렛이 진심으로 사죄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모습은 이와 무척 대조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형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져 줍니다. 용서를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방향으로의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요 ‘어린양’의 비전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이 어린양의 비전으로 충만하고 그 비전을 구체화하는 열매가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1월 21일 주일설교)
Posted by jaws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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